과거 e커머스 회사에 팀장으로 있을 때 정말 많은 UX 디자이너의 면접을 봤는데, 상당수의 디자이너가 디자인 에이전시 출신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이직을 원하는 이유를 물어보면 모두가 동일한 대답을 합니다. 디자인 에이전시에서 몇 년간 일했는데 이제는 남의 회사의 디자인이 아닌 내 회사의 서비스를 디자인하고 싶다는 이야기입니다. 디자인 에이전시에 근무하는 많은 디자이너들이 어느 정도의 경력이 쌓이면 이러한 이유로 이직을 결심하곤 합니다.
저는 디자인이라는 업의 본질이 에이전시라는 구조에 더 맞는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누군가 디자인 영역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면, 어떠한 산업 도메인이더라도 디자이너의 창의적인 시각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야말로 디자인이라는 업의 궁극적인 가치에 더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비즈니스적인 구조상 디자인 에이전시가 규모적으로 성장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보니, 직장인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고, 국내 기업 문화의 특성도 있다보니 인하우스 디자이너가 되기를 선호하는 경우가 좀 더 많은 것 같기는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자기 서비스나 제품을 만드는 회사의 디자이너가 존재하고, 다른 회사에서 의뢰한 디자인을 수행해 주는 전문 회사의 디자이너가 존재하다 보니 이 둘의 직업적 차이와 장단점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는 있는 것 같습니다.
에이전시 디자인 업무
장점
디자인 에이전시에서 일하면 정말 다양한 디자인 영역과 산업 도메인에 대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안정적인 디자인 에이전시라면 유명한 클라이언트의 주요한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드는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고, 이러한 클라이언트가 다수라면 디자이너에게는 좋은 경력과 경험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디자인 에이전시는 다양한 디자이너들과 함께 일하면서 자신의 수준이나 역량을 체크하며 성장하기에도 좋은 구조이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디자인 프로세스에 따라 일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습니다. 이러한 프로세스를 바탕으로 체계적인 디자인 결과물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자인 에이전시의 프로젝트가 짧게는 1개월에서 길게는 1년 단위까지 진행되는 경우가 있는데, 새로운 것을 경험하기 좋아하는 디자이너라면 이 부분도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점
반면, 같은 이유로 이 부분이 단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제한된 기간 동안 목표한 디자인 결과물을 내고 또다시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면 하나의 분야를 깊이 있게 경험하기 어렵다는 것이 단점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서비스의 UX를 디자인하는 과정에 참여할 수는 있지만, 실제 서비스 운영 중에 발생하는 고객 데이터를 바탕으로 agile 하게 수정해가는 경험을 쌓기도 어렵습니다.
즉, 다양한 프로젝트 경험이 포트폴리오로 쌓이는 점은 큰 장점이지만 커머스 분야의 UX 전문가라거나 헬스케어 분야의 UX 전문가라는 타이틀을 추구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또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경험하는 만큼의 다양한 클라이언트를 상대해야 합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만큼 매번 좋은 클라이언트와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 실무적으로는 스트레스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클라이언트의 일정과 요구를 반영하다 보면 자신의 업무가 불규칙해질 수도 있습니다.
직장으로서는 대부분의 디자인 에이전시 규모가 크지 않다 보니 직업적으로 조금 불안정하게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인하우스 디자인 업무
장점
인하우스 디자이너로 일하면 디자인 이외에도 회사의 전반적인 시스템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고,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 함께 일하며 업무적인 관점을 넓힐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해당 기업에서 다루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좀 더 깊게 들여다보고 이해할 수 있는 경험을 가지게 됩니다.
인하우스라고 하더라도 회사의 업종이나 규모는 천차만별이겠지만, 대기업 소속으로 유명한 제품이나 서비스를 담당하게 된다면 경험을 쌓으며 자부심도 함께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변에서 회사의 네임 밸류만으로도 나의 가치가 올라가는 경험을 할 수도 있습니다.
스타트업의 경우 회사가 성공적으로 성장하게 된다면 자신의 힘으로 서비스를 성장시켰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또한 직접적으로 서비스를 사용하는 사용자의 데이터를 통해 UX를 개선해 나가는 data driven UX를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단점
반면, 인하우스 디자이너로 일하면 생각보다 디자인 업무로서는 재미를 느끼기 어려운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제조사의 경우 매년 새로운 플래그십 모델을 루틴 하게 개발하다 보니 생각보다 창의력을 발휘할 기회가 없을수도 있습니다. 디자인 능력보다는 업무 능력이 더 중요할 수도 있고, 디자이너라기보다는 회사원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디자인을 전공으로 선택한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창의력을 발휘하고 싶어하는 성향이 강하다 보니 이러한 부분이 더 재미없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쇼핑앱에서 일 년 동안 장바구니 UX만 디자인한다고 한번 상상해 보면 와닿을 수도 있는 부분입니다.
디자인을 중시하는 업종이나 큰 기업의 경우 디자인 팀에 소속된 디자이너일 수도 있지만, 작은 회사 혹은 스타트업의 경우 여러 이해관계자들 사이에 혼자만 디자이너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본인의 디자인 수준이나 성장 정도를 확인하기 어렵다는 것도 단점이 될 수 있습니다.
초기 형태의 스타트업이라면 디자인 이외에 담당해야 할 역할도 많습니다. 최근의 스타트업들은 개발자, 기획자, 디자이너라는 전문성을 구별하지 않고 problem solver라는 동일한 역할을 기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부분은 개인의 성장 계획에 따라 단점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소규모 스타트업이라면 오히려 디자인 에이전시보다도 직업적인 안정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에이전시와 인하우스 중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나?
저는 대기업 제조사에서 시작했지만 서비스 회사의 경험도 있고, UX 디자인 에이전시의 경험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프리랜서로 일해보기도 했습니다. 디자이너마다 자신에게 맞는 회사의 속성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모든 경험을 다 해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주니어 디자이너일 때에는 디자인 에이전시에서 다양한 산업 도메인을 경험해보고, 자신에게 맞는 분야를 찾아 인하우스 디자이너로 성장하는 것이 좋은 커리어 패스가 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인하우스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새롭고 창의적인 경험을 위해 디자인 에이전시나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옮겨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직업적으로만 보자면 인하우스냐 에이전시냐의 고민이 아니라, 대기업이냐 중소기업이냐라는 고민이 더 솔직한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기업 인하우스에서 시작하여 30대에는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하다가 40대 이후가 되면 선택의 스펙트럼이 급속도로 좁아지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반면, 에이전시에서 시작하여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자신의 길을 좀 더 일찍 깨닫는다면 더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 나갈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정답은 없지만, 20대에 대학을 졸업해서 적어도 20년 이상 디자이너로서 살아갈 생각이라면 어디에서 일하느냐보다 자신의 경험을 어떻게 채워 나갈지에 더 집중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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